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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iness/Sadness.

스타인카푸스 2013. 12. 19. 05:51

파릇파릇한 해피한 스타일의 여자애 한명이 전에 내게 해피하냐고 물었다.

그때 해피하다고 답했다.


근데 그다지 해피해보이진 않는다고 물었다.

나는 그건 쌔드하기도 해서 그렇다고 답했었다.


해피하면 해피한거고 쌔드하면 쌔드한거지 그게 말이되냐는 다음 질문에,

난 언제나 해피하며 쌔드한 거라고 답했다.

그리고 그것이 삶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믿는다.


물론 해피함만으로 충만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건 지속될 수가 없기에, 그리고 그것을 알기에 쌔드하기도 하다.

언젠가는 그 순간이 변할 것을 알기에.

물론 그 순간은 변할지언정 다른 종류의 행복이 와서 다른 해피함으로 채워줄 순 있다.

하지만 한 장미를 보고 해피함을 느꼈는데 이번엔 백합과 프레지아 라일락을 준다해도 그 장미가 시들을 것은 여전히 슬프다. 그리고 그 장미에게 아름다움과 슬픔을 함께 전해주는 것이 예의(=바람직함)라 생각한다.

다른 장미가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하여도 그 장미가 지금 내가 보는 장미와 같을 수는 없다.


아기의 귀여움을 보며 동시에 성숙했을 때 그 귀여움이 다른 모습이 될 것에 조금의 슬픔을 느낀다라할까.

물론 커가며 다른 종류의 기쁨을 주겠지만서도.

어떤 의미론 행복속에서 슬픔을 느끼는 것이 그 상황을 충실히 사는 것 같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은 행복만을 느끼는 것이 그 상황에 충실한 것이라고 말하겠지만서도.)



주변을 보며 안타깝다고 느낄 때가 많다.

세상은 알면 알수록 안타까운 것 같다.

그리고 그 중 나의 모습도 상당히 안타깝다.

어쩌면 내가 가장 안타깝다고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인 한 명이 내게 우리가 아는 사람들이 모두 다 잘 되었지 않냐고 물었다.

잘 되었긴 했다만 난 함께 기뻐해 줄 순 없었다.

왜냐면 난 그 사람들이 더 높은 곳을 바랬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 나은 대학, 더 나은 직장, 더 나은 시기, 더 안정된 삶, 더 나은 배우자.


허황된 잠시만의 바램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다들 더 많은 것을 기대했다던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상황도 충분히 잘 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들의 바램에 미치진 않는다는 것도 알고있다.

시간이 지나며 잊어가며 본인들은 안타까움을 잊겠지만(나도 잊고 있지만).

하지만 내 기억들은 살아남아 그들을/나를 안타깝다 여긴다.

운이 안 좋았을 수도 있겠지만 충분히 열심히 하지 않았기에 그렇기도 하겠지(나의 경우).


그런 것을 떠나서도 안타까운게 많다.

더 멀리 보지 못해서,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말을 가져올지 몰라서 우리가 하는 생각들/행동들.

듣기싫은 얘긴 차단하며 듣고싶은 얘기에만 무게를 주며 그렇게 스스로를 정당화하지만 결국은 그 사이에 누군가를(본인일수도 있다) 어느 정도 밟을 수 밖에 없는 것을.

타인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억지로 꺼내며 자신의 행동에게 이유를 부여하려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모습은 자신만의 모습인 것을.

물론 나도 포함된다.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반면 누군가를 밟는다는 것이 결국 상대방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해서 그런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것 같다.

자신의 좋은 행동이 나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란 생각은 합당한 것 같아도 자신의 나쁘다 싶은 행동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 확신하는 것은 도를 넘은 생각인 듯 하다.


눈앞의 행복을 얻기 위해 우린 (때론 더 값질 수 있는)다른 행복을 생각해보지도 않고 버리는가.

눈앞의 슬픔을 피하기 위해 우린 (때론 훨씬 더 클 수 있는)다른 슬픔 속으로 우릴 몰아넣는가.

마음 아플 때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