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친구와 안락사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어쩌다 필요악이란 것에 대한 생각에 이르렀다.
전에 느낀 것보다 훨씬 크게 다가온 새로운 이것에 대한 인식들.
나의 많은 결정들이 이것에 대한 인식에서 이뤄짐을 안다.
맘에 안드는 두명의 대통령 후보들이 붙는다하면 덜 맘에 안드는 사람이라도 뽑아야 하고.
때론 사람들에게 덜 소외됨을 느끼게 하기 위해 친한 사람에게 친한 척하지 않고.
심지어는 남을 돕고싶음에도 너무 바쁨에, 혹은 다른 누군가가 돕고있음에 돕지 않아야하는 그런 것.
큰 부분이 정당화라는 것은 이미 알고있다.
그럼에도 그렇게 행동함이 나의 뼈저리게 슬픈 부분이랄까.
직원이 한명 있다하자.
성실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자식들을 사랑하고 그런 직원.
임신한 아내가 아파 급히 그를 불러서 그가 직장을 떠난 사이 직장에 불이 났다하자.
회사는 큰 손실을 봤고 직원을 여럿 잘라야하는 상황이 왔다하자.
다른 직원을 자르며 이 직원을 자르지 않을 수 있는가?
형평성을 고려한다면 가장 먼저 잘라야한다.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아무리 인간성이 좋은 친구라 하여도 그렇지 싶다.
때론 삶은 원하지 않는 것을, 우리 스스로의 자원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범위에 던져주기에 우리는 '선'이라 생각하는 것을 행하지 못하고 '악'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을 행해야만 한다.
그것이 슬프지 않은 일이라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사자 성어론 '읍참마속.'
군령을 어기고 나라를 위험에 빠트린 아끼는 장수 마속을 본보기로 삼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베다.
벤다하여 전의 잘못이 바로되는 것은 아니다.
미래의 변호사로서 생각해본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감옥에 보내고 아비없는 자식을 만든다해도 그래야만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
이미 범죄는 저질러진 것이고, 감옥에 보내는 것을 누가 확실한 '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 종교의 가르침은 복수를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때로 사회는 복수없이 돌아가지 않는다.
필요악.
반면 범죄자의 입장에서 변호를 해야할 수도 있다.
스스로 '악'이라 생각하지만서도 '선'이라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며 내 모든 지식과 경험을 다해 변호해줘야하는 그런 상황.
사람들은 날 '악'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신념은 그렇지 아니할텐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범죄자는 변호할 자가 필요없는가?
아니다. 필요하다.
나는 필요악이 되어야 한다.
지인이 한명 있다.
남에게 쓴소리를 하지 못하는.
때론 그것때문에 오히려 스스로를 힘들게 만드는 것 같은.
혹은 그것때문에 주변 사람들도 힘들게 만드는 것 같은 그런.
만약 너에게 누군가를 잘라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면 넌 그럴 수 있을까?
그럴 일이 없었으면 진심으로 바란다만 넌 그럴 수 있을까.
만약 자르는 것이 주변의 모든 것을 더 원만하게 하는 행위라도 그럴 수 있을까.
순수한 것은 순수하게 남았으면 한다.
가능하면 돕고 싶다.
하지만 내가 도울 수 없는 상황이 너무 많다는 걸 인식한다.
그리고 여운이 가시지 않는 슬픈 것 하나는.
이 필요악이란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마 한평생 날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반면 난 이 필요악이란 것을 버리지 않는다면 한평생 널 이해하지 못하겠다만.
난 평생 버릴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이것없이 난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